하고싶은말

자발적 복종.

Doodler 2012. 12. 2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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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회주의, 즉 나치즘은 히틀러라는 고유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서양 대의민주주의 이념의 핵심적인 가정 가운데 하나는, 각 개인들의 의지가 선거를 통해서 보편적으로 실현되기 때문에 투표에 의해 뽑힌 대표자는 그가 대통령이든 혹은 국회의원이든 간에 공정하고 선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 이념의 이런 가정은 히틀러의 총통 당선으로 인해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히틀러는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압도적인 지지와 열광 속에서 당선되었던 정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수결의 이념이 절대적인 진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슬픈 사례였다고 하겠다. 당시 독일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었고, 독일 국민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커다란 불안과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때 히들러는 불안과 불만이 가득찬 독일인들에게 '위로부터의 해결'을 약속하면서 말 그대로 왕처럼 강림했던 것이다.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라이히(Wilhelm Reich)가 지적한 것처럼 당시 히틀러 통치하의 독일 국민들은 자신들이 곧 "작은 히틀러"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다시 말해 독일 국민들은 총통의 결정이 곡 자신들의 결정인 것처럼 믿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자발적인 복종'이야말로 나치즘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한 가지 계기라고 할 수 있다. 피통치자가 자신이 수탈의 대상이라는 것을 오히려 망각하고, 그 수탈을 외적인 결정과 의지로부터가 아닌 내적인 자기 이지와 결정으로서 수용하는 것처럼 느낄 때 나치즘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열광과 환호 속에서 피 통치자들은 자신이 엄연한 판단의 주체이자 또한 책임의 주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었다.

 

강신주 <철학 VS 철학> 아도르노 vs 아렌트 中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가지 변화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즉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마지막으로 사자가 어린아이가 된다는 이 변화를 말하려고 한다.

 

강하고 참을성이 있는, 그리고 외경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정신에 있어서는 짊어져야 할 중압도 크다. 왜냐하면 강한 정신은 무거운 것, 가장 무거운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그런 참을성 있는 정신은 이렇게 묻고, 그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무거운 짐이 실리기를 원한다.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인가? 그 대 용사들이여? -하고 참을성이 강한 정신은 묻는다. 그것을 내 등에 지고 싶구나. 그리하여 내 힘이 억센 것을 스스로 기뻐하겠노다.

 

가장 무거운 것이란? 자기 교만을 억누르기 위하여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아닐까? 자기의 지혜를 조롱하기 위해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중략...

 

참을성이 강한 정신은, 이러한 일체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등에 짊어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짐을 싣고 사막을 향해 달리는 낙타처럼 자신의 사막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제일 고독한 사막에서는 제2의 변화가 일어나 정신은 사자가 되고 사자는 자유를 쫒아 이를 잡으려 하며 사막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게 된다. 여기서 정신은, 그를 최후로 지배했던 자를 찾는다. 그리하여 최후의 신과 대적하고 그 거대한 용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이 이제는 지배자나 신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거대한 용이란 어떤 것인가? 이 거대한 용은 '그대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고 불리지만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라고 말한다.

 

'그대는 해야 한다'는 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정신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그리하여 그 비늘 한 장 한장마다 '그대는 해야 한다'가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이들 비늘에는 천년의 가치가 번쩍이고 있다. 여러 용 중에서 가장 힘이 센 그 용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가치 - 그것은 나로 인하여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이미 모든 가치는 창조되었고 그리고 창조된 일체의 가치는 바로 나다. 진실로 '나는 하고자 한다.'는 말은 이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용은 말한다.

 

형제들이여! 왜 정신에 있어서 사자가 필요한가? 왜 무거운 짐을 견디는 짐승, 체념하고 경건한 낙타만으론 부족한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 - 이것은 아직 사자로서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의 자유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 - 그것은 바로 사자만이 비로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유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의무에 대해서조차도 성스러운 부정을 서슴치 않는, 이것을 위해서는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가치를 마련할 권리를 자신을 위해 획득하는 것 - 이것은 참고 견디는, 그리고 경건한 정신에게는 너무나도 끔찍한 행위이다. 진실로 그것은 약탈이며, 맹수라야 비로소 할 수 있는 행위다. 일찍이 정신도 저 '그대는 마땅히 해야 한다'를 가장 성스러운 것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가장 성스런 것 속에서조차 미망과 자의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글기고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강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빼앗기 위해 정신은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나의 형제들이여! 말하라! 사자도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무엇일까? 왜 강탈하는 사자가 더욱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어린아이는 순진함이고 망각이다. 새로운 시작이자 유희이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고,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형제들이여!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바야흐로 정신은 자신의 의욕을 원하고, 그리하여 속세를 등진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中

 

 

 

 

사람들은 언제나 객관적이지 못하다.

 

자신의 행동 하나, 생각이 모두 자신의 주체적인 결정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물건 하나를 살 때조차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노출된 수많은 광고따위는 잊은 듯이 행동한다.

 

사실 '자발적인 복종' 이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5년 전이 그랬듯, 우리는 우리가 뽑는 대표자가 우리의 삶을 크게 바꿔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대표자를 우리와 동일시 하는 순간, 우리는 '자발적 복종' 안에 이미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무거운 짐을 견디는 짐승, 체념하고 경건한 낙타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데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그대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자발적 복종'을 하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나는 하고자 한다'라는 태도로 사자의 행세를 한다.

 

개인 스스로가 모두 어린아이가 되길 바라는 것은 나의 순진함일지도 모른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