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 창고

백미러 속 풍경.

Doodler 2004. 3. 30. 14:53

 

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녀의 식구는 조부뿐이었다. 조그만 집에서 어린 시절부터 조부와 함께 살았던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느라고 다른 남자가 자신을 늘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겨를도 없었다. 사랑이 깨어지는 일은 그치지 않고 발생한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더 사랑한 사람이 더 기억하고 그 사랑에 더 몰두한 사람이 그 깨어짐으로부터 멀어지는 데 시간이 더 걸릴 뿐.

 

그를 사랑하는 일에 깊이 빠쳐들었던 그녀는 사랑이 끝나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먼 발치에서도 그녀를 다시 볼 수 없게 된 혼자서 그녀를 사랑한 다른 그가 그녀의 흔적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녀가 사라진 후 그녀의 조부도 세상을 떠났으므로 누구에게도 그녀가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다른 그는 겨우 사라진 그녀가 오래전에 친구와 길을 떠났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그녀의 친구를 찾아내어 그녀가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지요? 친구는 고개를 더 깊이 숙일 뿐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사라진 그녀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곳은 낯선 지방의 비탈길이었다고 했다. 비탈길에서 내려다보면 평지가 내려다보였고 거기에 백양나무 숲이 이었다고 했다. 뒷모습을 내보이며 숲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평지가 내려다보이는 비탈길의 찻집에서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중에 사라진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손을 씻고 오겠다고 했단다. 그렇게 자리를 뜬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다 지친 친구가 무심코 평지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씻고 오겠다던 그녀가 평지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는게 보였다. 모두들 둘이거나 셋이거나 혹은 다섯인데 그녀만 혼자였다. 흙에 발을 대고 서서 나무들을 바라보고 혼자 서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외로워 보여 친구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찻집의 유리창에 손바닥을 갖다댔다. 그 순간이었다고 했다.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졌던 순간은. 놀란 친구가 찻집에서 뛰어나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나무들 사이를 헤메고 다녔으나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요?

 

사라진 그녀와 마지막으로 여행을 함께 했던 친구가 오히려 그에게 물었다. 사라진 그녀를 혼자서 사랑했던 그는 그녀의 흔적을 찾아 그 평지엘 갔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와 햇빛뿐이었다. 그는 근처에서 삼 년 동안 머무르며 그녀가 사라진 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오지 않았다. 어느 날 어쩌면 내가, 혹은 당신이 평원이 내려다 보이는 비탈길의 찻집에서 차를 마시다가 평지의 나무들 사이를 걸어다니는 사람들 속에 한 남자가 혼자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가 너무 외로워 보이기 따문에 그 남자의 뒷모습을 눈여겨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차를 한 모금 삼키는 순간 이번엔 그녀를 찾아 헤매던 그가 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을지도.

 

*

 

오래전 사람들에게 풍경은 쉬엄쉬엄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았을 때 문득 눈앞에 펼쳐지는 장엄한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런 풍경은 사라졌다. 풍경은 타고 가는 차의 앞 유리창이나 옆 유리창의 크기로 축소되었으며 그마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서 멀어져간다. 백미러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차를 멈추고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도 모르게 논에 고인 물이나 길 양편에 서 있는 나무들을 만나면 저것 좀 봐, 갑자기 차를 세워버리곤 했다. 뒤따라오던 자동차들이 놀라서 경적을 울려대었다. 그때마다 백미러속에서 나를 지켜보는 풍경들.

 

길거리에 서서 누군가를 오래 기다렸던 날이 있었다. 막 감고 나온 젖은 머리가 얼어붙었다. 밤바람에 뺨이 터질 것 같은데도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는다. 터널을 빠져나와 내 앞을 질주해가는 자동차들을 세 시간 동안 지켜본 다음에야 얼음을 털어내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그를 기다리지 않기로 하고 운전교습소에 나갔다. 언제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해변으로 숲길로 내달릴 생각을 했다. 기다리지 않는 대신 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고통을 단호하게 끝내고 싶었다. 간혹 신새벽에 깊은 밤중에 길을 떠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기다림을 끝장 낼 수는 없었다. 인생은 기다리는 순간들이 쌓여서 완성되는 것이기도 했으니 기다리지 않는 삶이란 존재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누군가 내게서 떠나는 것을 백미러로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다가왔다가 멀어지면 그 자리에 풍경이 남았다. 모든 풍경을 백미러 안에 두는 새로운 기다림이 발생한 것이다. 지금 양손에 붙들고 있는 핸들을 놓으면, 차에서 내려 몇 걸음만 걸으면 저 풍경과 다정하게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그런 축복은 허락되지 않는다. 친밀감이 오히려 두려운 세상이다. 그래도 가끔 생각한다. 차를 몰고 가다 가끔 아름다운 풍경과 만났을 때 차를 버리고 하염없이 걸어서 풍경 저편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을.

 

신경숙의 " 자거라, 네 슬픔아 " 中

 

음. 내가 시간이 남는 가보다. 아닌데. 바쁜데.( 아~ 팔이 아프다 ^^;;)